1. 말씀묵상
인간은 오랜 역사 가운데 제도를 만들고 지금까지 운영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 자유 민주주의는 가장 탁월하고 발전된 제도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 분야를 보더라도 자유 민주주의로 인하여 발전하고 성숙하고 눈부신 성장을 이룬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 민주주의가 흠이 없는 제도는 아닙니다. 그 제도가 가진 단점 가운데 치명적인 것 중 하나가 다수결의 원리입니다.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다수가 선택한다고 해서 그것이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으며 소수의 사람이 선택한다고 해서 무조건 틀린 답일 수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사람들을 마음을 뜨겁게 끓어오르게 하는 선동의 대가였습니다. 히틀러가 독일 국민 대다수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는데 그렇다면 히틀러가 절대적인 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대중은 이렇게 선동당하기 쉽습니다.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되는데 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이 써 내려간 역사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소수의 사람들이 이어 온 믿음의 과정을 설명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본문은 십사만 사천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배교하고 황제에게 무릎을 꿇은 사람들은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이름 666의 표를 받습니다. 국가 권력은 로마황제에게 절한 자들에게 짐승의 표를 주고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짐승에게 무릎 꿇지 않고 믿음의 정절을 굳게 지킨 자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그 숫자는 십사만 사천입니다. 우리는 십사만 사천이 셀 수 없이 많은 수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 12와 12의 곱과 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1000이 곱해져서 십사만 사천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사만 사천의 구원받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4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이 사람들은 더럽히지 않은 순결한 자들이고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쉬운 말씀처럼 보이지만 실천하려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어린 양이 우리를 깊은 골짜기 험산준령으로도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요구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좁은 길은 때로는 고난의 길입니다. 하지만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기록된 백성들은 어려워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길이 있고 결단의 순간이 놓여 있습니다. 그 때마다 어린 양과 함께 가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6절을 보십시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거주하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계시록은 ‘거주하다’라는 단어를 세 가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스케노오인데 하나님의 영적 임재 가운데 거할 때는 ‘스케노오’를 사용합니다. 두 번째,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을 ‘카토이케오’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가 여기 기록된 거주하다인데 ‘카데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카데마이’는 한 쪽 발은 믿음에 두고 한 쪽 발은 세상에 두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삶을 카데마이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카데마이의 인생을 사는 자들을 하나님은 가슴 아파 하십니다. 심판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천사가 카데마이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끝까지 애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영적 임재의 스케노오의 인생을 살고 있는지, 이도 저도 아닌 카데마이의 인생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카토이케오의 인생을 살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스케노오의 삶을 살고 있다면 카데마이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 회개하게 하고 돌이키도록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에 종말이 오면 예수님께서 낫을 가지고 마지막 추수하실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인자와 같은 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손에 낫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농부라고 배웠습니다. 농부이신 주님은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양분을 주고 기다리는 동시에 추수 때가 되면 낫을 가지고 곡식을 거두십니다. 심판 날 추수 때가 되면 농부이신 그리스도는 알곡과 가라지를 따로 나눌 것입니다. 알곡은 모아서 곳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모아서 불 태워 버릴 것입니다. 이제 심판의 시기가 그만큼 다가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농부이신 주님,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만 생각했는데 그것은 단편적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농부이신 그리스도는 낫을 가지고 거두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이제 우리는 추수 때 알곡이 되어서 하나님의 천국 곳간에 들어가는 자가 될 것인지, 카데마이의 인생, 카토이케오의 인생을 살며 알곡인 척 위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 돌이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자가 되어 주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 뒤를 따라 십자가 지고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 믿음의 백성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2. 실천다짐
1)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2) 스케노오의 삶을 살겠습니다.
3. 한줄기도
사랑의 하나님,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가며 영적 임재 가운데 살아가게 하옵소서.
성경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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